오늘의 식사

2/8 저녁

쿤발씨 2017. 2. 10. 22:14

2/8 저녁 

동교동, 신촌 사이에 있는 짬뽕집 

짬뽕6000원


분명히 점심을 필요 이상으로 많이 먹었는데도 이른 저녁부터 배가 고팠다. 단편소설 쓰기 첫 수업이 끝나고 홍대 근처에서 여유롭게 먹으면 되겠거니 생각했건만, 마침 시간도 한 시간 착각해 일찍 와버렸다. 집에는 간병이 필요한 아빠가 계시고 오늘은 간병인도 쉬는 날이었기에 집에 붙어있어야 했지만 나는 나왔다. 그것도 한시간이나 일찍. 일부러 그런 건 아니었다. 그냥 때때로 확인해야 할 것을 안 하고 무작정 행동하고 싶을 때도 있는 것이다. 결단코 일부러 엄마만 집에 두고 도망나온 것이 아니다. 갑자기 한 시간의 비는 시간이 생기니 기분이 좋았다. 수업 준비물인  '쇼코의 미소'를 샀고 어디 따뜻한 까페에라도 앉아 읽으면 참 좋을 것 같았다. 시간도 적당한 것 같았고, 모범 학생이 된 것 같았다. 커피향과 따뜻한 조명이 순간적으로 그리워졌다. 급작스럽게 배가 고파온 때는 그 때였다. 


연어 덮밥이 먹고 싶었다. 그건 뜬금없는 계시같은 건 아니었다. 나는 일주일에 서너번쯤은 연어덮밥이 먹고 싶단 생각을 한다. 익숙한 동네라면 연어 덮밥을 어디서 파는지 정도는 꿰뚫고 있다. 연어 덮밥 지도를 만들 수 있을지도 모른다. 마찬가지로 홍대에서도 연어 덮밥을 먹어본 일이 있다. 일렬의 바 테이블밖에 없는 작은 덮밥 집이다. 연어 덮밥이라면 까페에서 미리 한 시간동안 '쇼코의 미소'를 읽는 것을 포기할 수도 있을 것 같다. 바로 계획을 바꿔서 이른 저녁을 먹고 식당에 그대로 앉아서 '쇼코의 미소'를 조금만 읽기로 한다. 조금 수정되었지만 나름 괜찮은 모양새라고 생각한다. 


오후부터 휴업을 한다는 간단한 알림만 남겨놓고 덮밥집은 문을 닫았다. 사장의 옷깃을 붙잡고 흔들면서 적어도 왜인지는 설명해줘야 할 것 아니냐고 물어보고 싶었다. 요즘 들어 일부러 찾아가는 장소마다 마침 휴업을 한다는 징크스가 만들어지기 직전이라 제대로 공을 들여 절망하고 싶었지만 그런데 쏟을 시간은 남지 않았다. 주도적인 것과 떠밀리는 것은 아주 잠깐의 차이이다. 나는 목적을 잃어버린 채로 아무데로나 흘러다니기 시작했다. 수업을 하는 와우산로까지 걸어가며 타협을 해보려고 했는데 마침 내가 든 길은 까마득히 아무것도 없는 철저하게 고즈넉한 길이었다. 저 선로 옆으로 서점 몇개가 외롭게 불을 밝히고 있을 뿐이었다. 결국 목적지까지 왔을 때는 이미 자포자기해서 '아무거나'로 희망 메뉴가 바뀌었다. 


신촌 쪽으로 조금 걷다보니 작은 짬뽕 전문점이 하나 나왔다. 그 '아무거나'에도 포함되지 않는 메뉴였다. 아무리, 내가, 나의 대책없음과 나쁜 운 때문에 초조해하고 있다고 하더라도,  이렇게까지, 자존심을, 내던지고 싶지는 않았다. 짬뽕 자체를 싫어하는 것은 전혀 아니었지만, 며칠전에 고급 음식점에서 반 젓가락만 먹고 남긴 매운 짬뽕에 대한 기억이 되살아났던 것이다. 동석한 친구들은 먹기를 포기한 나를 놀려댔고, 나는 앞으로 식사로 짬뽕을 시키는 일은 없을거라고 다짐을 했던 것이다. 하지만 오십 걸음쯤 걷고 나서는 '내 자존심을 내세우기조차 포기할 정도로 아무거나'로 메뉴가 바뀌었다. 앞으로 뻗은 길고 어두운 도로가 내 마지막 기세까지 꺾어버렸던 것이다. 나는 짬뽕집으로 돌아가 가방을 팽개치듯이 내던지고 옷을 아무렇게나 의자에 구겨 걸었다.  옆 테이블에 고등학생 정도로 보이는 여자애들 둘이 어마어마하게 큰 그릇에 든 짬뽕을 먹으며 얘기를 하고 있었다. 


5000원짜리 짜장면, 6000원짜리 짬뽕, 그리고 조금 더 비싼 해물짬뽕 등이 메뉴로 걸려 있었다. 짬뽕이 별로 맵지 않다는 확인을 받은 후, 일반 짬뽕을 주문했다. 왜 짬뽕은 싫다고 하면서 짜장면을 시키지 않았냐고 묻는다면, 어쨌거나 그곳은 짬뽕 전문점이었고, 이왕 왔으니 설령 실패하더라도 그곳의 대표 메뉴를 먹어봐야겠다는,  그래서 이 탐탁치 않은 방문을 맛집 기행으로 변화시키겠다는 마지막 긍정의 태도였다고나 할까. 그렇게 주문된 짬뽕은 곧 거대하고 흰 플라스틱 그릇에 담겨 그 가게와 어딘가 어울리지 않는 40대 정도 되는 미모의 아주머니 손에 들려 나왔다. 나는 조금 맛을 본 뒤, 허겁지겁 먹었다. 오른손의 젓가락으로 면을 집어 왼손에 든 수저에 양파와 고기, 해물을 올려서 국물을 흥건히 올려 아주 맛있게 먹었다. 누군가 내 모습을 보았다면 아마 짬뽕 광고를 찍는다고 생각했을 것이다. 그 비결은 어떤 사람도 거부할 수 없을 익숙한 맛 때문이었을 것이다. 그것은 라면 스프의 맛이었다. 오래전에 제주도 공항에서 먹었던 짬뽕 이후로 이렇게 짬뽕 그릇을 비운 적은 없었다. 치트키로 만들어진 음식이었지만 나는 우연히 얻어걸린 것 치고는 괜찮은 식사였다고 생각했다.  곧 사람들이 북적북적하기 시작했다. 나는 그 자리에 계속 앉아서 라면스프 향이 나는 빈 그릇을 앞에 두고 쇼코의 미소를 꺼내 조금 읽었다.